Project Description

한독 청년 네트워크 „10개 질문“ 워킹그룹 인터뷰 입니다.

참고: 저희 인터뷰 파트너들의 발언은 그들의 개인적인 의견을 나타내며, 한독 포험 또한 한독 청년 네트워크의 의견을 반영하지 않습니다.

  1. 독일 대사로서의 경력에서 지금까지 이겨내야 했던 가장 힘든 상황은 무엇이었나요? 또 독일인으로서 그리고 여성으로서 가장 큰 난관은 무엇이었나요?

제 대사 경력 중 가장 어려웠던 상황은 2012년 타지키스탄 대사로 근무할 때였는데, 파미르 지역의 수도인 코록에서 정체불명의 단체와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수많은 관광객들의 발이 묶여 있었을 때였습니다. 이웃 국가에서 넘어오는 아프가니스탄 출신의 무장 세력의 존재가 우려되는 상황이었으며, 매체에선 아무런 뉴스도 제공되지 않았으며,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경로도 불분명했을 뿐만 아니라, 주 당국은 비협조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대사관의 목표는 모든 관광객과 현지에서 개발 프로젝트에 종사하는 독일인 가족들의 포함한 외국인들을 가능한 한 빨리 위험지역 밖으로 대피시키는 것이었지만, 당시 (열악한) 교통기반시설을 고려할 때 이는 매우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부가설명: 두샨베(Duschanbe)에서 코록(Khorog)까지 통과 가능한 유일한 육로는 아프가니스탄 국경을 끼고 수백 킬로미터에 달해 언제라도 봉쇄될 가능성이 있었습니다.) 독일 대사관은 수일간 긴급 대책 본부 체제로 전환되었고, 대사관과 국제기구 간의 긴밀한 협력은 제가 지금껏 겪어본 것 중 단연 최고의 경험 중 하나였습니다. 현지 상황은 굉장히 심각했고 수많은 현지인 희생자가 발생했지만 불행 중 다행으로 외국인들에게는 별다른 피해가 없었고 모두 안전하게 두샨베로 이송되거나 파미르 고속도로를 통해 키르기스스탄으로 빠져나갈 수 있었습니다.

독일인으로서 혹은 여성으로서 특별한 문제나 어려움을 겪은적이 있었는지요? 운이 좋게도 아니요. 다행히도 제가 파견되어 근무한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독일인인 저를 매우 친절하게 대해주었고, 특히 1992년부터 1996년까지 근무했던 러시아 연방에서 역시 2차 세계대전의 큰 역사적 중압감에도 불구하고, 저를 따듯하게 맞아주어 독일인으로서 매우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여성대사로서 직위나 업무수행에 관해서라면, 여성이기에 받았던 불이익은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독일 대사관 대표로서 저는 늘 존중과 예우를 받았고, 그 이유는 아마도 성별보다는 직책이 더 우선시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다만 북한에서는 한동안 제가 유일한 여성 대사였기 때문에 한동안 항간의 주목을 받기도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인도네시아에서도 여성 대사를 파견하면서 이러한 „예외적 신분“도 사라지게 되었죠.

  1. 북한에서 생활하는 동안 느꼈던 불편함은 없었나요? 북한과 남한의 생활에서 직접 살아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요?

북한에서 특히 불편했던 순간은 특권을 누리는 외교관들과 외국인들의 삶이 북한 주민들의 현실과 너무나도 큰 차이가 있음을 실감할 때였습니다. 사례를 들어볼까요? 평양 시내가 온통 칠흑 같은 어둠에 잠기고 그 추운 날씨에 북한 주민들은 차가운 콘크리트 건물 안에서 아무런 난방시설도 없이 지내는 동안, 우리는 대사관 소유의 발전기 덕분에 따뜻하고 밝은 조명이 켜진 숙소에서 편안히 쉴 수 있었지요. 또한 잊을 수 없는 불편한 기억이라면 바로 군사화된 북한의 일상이었습니다. 유치원에만 가도 세 살짜리 아이들이 경례를 하고, 평양에서는 사람들이 대부분 무리를 지어 행진하는 듯한 인상을 받곤 했지요. 사방에 설치된 확성기에서 나오는 음악 역시 대부분 군대 행진곡들이었습니다. 당시는 김정일의 ‘선군정책’이 시행되던 시기였으니 당시에는 이런 현상들을 그러한 ‘군 제일주의’의 영향이 아닐까 해석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분리주의 체제”가 존재하는 나라에 살고 있다는 인상, 즉 외국인이 자국민과 접촉하는 것을 최대한 막고 최악의 경우 엄격한 통제와 관찰을 통해 제어하려는 시스템에에 대한 강박감이 저를 지속적으로 심란하게 만들었습니다. 일상적으로 마주치는 사람들은 매우 친절했고, 그 중에는 개인적인 친분을 이어가고자 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사실상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저를 무척 답답하게 했지요. 더군다가 규정을 어길시에는 나와 접촉했던 사람들이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어느 순간부터는 그러한 시도를 자연스럽게 자제하게 되었습니다.

북한에서 영양실조나 영양 부족은 체격이나 자세 면에서 육안으로 확연히 차이가 드러나기 때문에 적어도 제가 근무하던 시절에는 남북한 사람들의 차이가 한눈에 띄었습니다. 북한의 특권층이 거주하는 평양에서도 같은 맥락에서 이러한 차이가 눈에 띄는데, 제가 평양에서 근무하는 동안 남한을 방문했을 때 충격적일 정도로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북한에서 영양실조나 영양 부족은 체격이나 자세 면에서 육안으로 확연히 차이가 드러나기 때문에 적어도 제가 근무하던 시절에는 남북한 사람들의 차이가 한눈에 띄었습니다. 북한의 특권층이 거주하는 평양에서도 같은 맥락에서 이러한 차이가 눈에 띄는데, 제가 평양에서 근무하는 동안 남한을 방문했을 때 충격적일 정도로 뚜렷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지난 20여 년 동안 북한의 상황이 개선되어 이러한 격차를 더 이상 확연하게 느끼지 못할 정도로 좋아졌는지 여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만, 김정은 위원장이 몇 년 동안 식량 부족 문제를 반복적으로 언급해 왔다는 점을 감안하면 저는 오히려 회의적입니다.

남북한을 방문하면 육안으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또 다른 차이점은 바로 북한의 심각한 환경 훼손입니다. 박정희 정권의 삼림 조성 정책 덕분에 남한은 수십 년 안에 울창한 산림 국가가 되었고, 나무가 자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산림이 조성되어 있으며, 전국적인 차원의 녹화 사업이 남한의 기후와 물 균형에 얼마나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분명한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반면에 평양에 가까워지면 북한에 수목이 얼마나 부족한지 알 수 있으며, 차량으로 이동할 기회가 있다면 지속적인 삼림 벌채와 그에 따른 토양 침식이 초래한 황폐화의 흔적을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1. . 북한에서 체류하는 동안 타국에서 근무한 경험이 외교 활동에 얼마나 도움이 되었나요? 기존 경험과 비교하였을 때 유사한 점들이 있을까요?

1960년에서 1990년 사이에 동독에서 여러 차례 사적으로 체류하고 러시아 연방에서 4년간 근무한 뒤(1992-1996년), 저는 때때로 “‘실존하는 사회주의’의 친숙한 흔적”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는 인상을 받았고, 그 경험들이 유사한 징후를 보다 명확하게 식별하는 데 유용했다고 느꼈습니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징후들, 예를 들자면 특히 위계 구조에 대한 의심의 여지없는 수용은 제가 만난 다른 어떤 사회주의 국가보다 북한에서 훨씬 더 두드러진다는 인상도 받았습니다.

  1. 독일의 분단상황(1990년 통일 전)과 비교했을 때 한국의 분단현실은 어땠나요? 32년 전, 서독과 동독은 통일을 이루었지만, 지금도 여전히 그 차이가 존재하고 있는데요. 현재까지도 분단된 한국에서 생활하면서 남한과 북한에서 겪은 일상은 어떤가요?

제 생각에 한반도의 분단은 독일의 분단과 실질적으로 비교하기 어렵다고 봅니다. 분단의 원인부터 양국 간에 끔찍한 전쟁이 있었다는 점 그리고 그 분단현실이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는 것까지 많은 차이점이 존재하기 때문이지요.특히 이러한 전쟁의 경험으로 인해 양측의 사람들이 서로를 체제적 라이벌일 뿐만 아니라 실제로 적으로 간주하게 되었지요.

독일에서는 분단 시절 뿐 아니라 장벽이 세워진 후에도 매년 수십만 명의 양측 사람들이 전화, 편지, 소포 등을 통해 교류했었고, 특정 조건 하에서는 서로 방문도 가능했었습니다. 반면에 한국에서는 1953년 6월 휴전 이후 양측 이산가족이 어떤 형태로든 접촉할 기회가 거의 전무했지요. 2000년 이후 지금까지 21차례의 남북 이산가족 만남은 남한 인구의 거의 4분의 1이 북한에 뿌리를 두고 있거나 북한에 가족을 두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극히 미미한 수준입니다.

또한 남과 북의 젊은 세대가 갈수록 멀어지고 있는 것이 우려되기도 하지만, 이 주제는 제가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보다훨씬 더 철저한 분석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언젠가 이에 대해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한국에 계시다면 한국인 친구나 비슷한 연령대의 한국인들과 직접 이 주제에 대해 대화를 나눠보시길 권하고 싶습니다.

  1. 북한에 파견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기분이 어땠나요? 또 북한에 가겠다는 본인의 의지는 어느정도 였는지요? 또 그곳에서 지낸 시간 중 가장 아쉬웠던 점은 무엇인가요?

서울에서 근무하는 동안 비무장지대 반대편에서 일하는 것은 어쩔지 생각해본 적이 있었기에, 북한에 파견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매우 놀라기도 했지만, 돌이켜보니 동시에 매우 열성적이고 의욕감이 넘쳤던 것 같습니다. 당시 1988년엔 북한과 외교 관계가 없었기 때문에 그 곳에서 일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을 못했었기 때문이죠.

또한 북한에서 지내면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환경과 세계 최악의 정치 체제 하에서 어떻게든 삶을 영위해야 하는 북한 주민들에 대해 더욱 깊은 동정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유머 감각과 삶의 기쁨을 잃지 않는 모습, 체제와 여건이 허락할 때 우리의 협력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모습을 감탄시켰습니다.

또 하나 언급하고 싶은 것은 유럽연합의 동료들과의 긴밀한 협력에 대한 기억입니다! 특히 평양의 근무환경에서 우리가 서로 얼마나 긴밀하게 협력하고 지원할 수 있는지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그 경험은 지금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아주 좋은 추억입니다.

  1. 지금까지 근무하시며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하셨죠.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프로젝트가 있을까요?

2002년 초 독일이 북한 주민들에게 27,000톤의 쇠고기를 기부한 것은 잊을 수 없는 기억입니다. 당시 유럽에서 소해면상뇌증(BSE) – 소위 광우병 – 이 유행해 수만 톤의 쇠고기가 폐기될 예정이었지만, 독일 연방의회 일부 의원들이 굶주리는 북한 주민들에게 질병 검사를 거친 쇠고기를 기부하자는 제안을 내놓았죠. 이에 대해 찬반 양론이 팽팽하게 맞섰지만, 제가 북한으로 떠나기 직전에 실제로 소고기를 실은 화물선이 브레머하펜에서 출발했습니다.

이 프로젝트는 독일과 평양 주재 독일 대사관, 그리고 수행 기관인 GTZ가 북한에서 수행한 가장 인상적인 프로젝트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고, 당시 저뿐만 아니라 북한에 있는 많은 사람들의 기억에 오랫동안 남아있을 것입니다. 냉동 쇠고기를 실은 배가 평양에 도착하기 불과 2주전 제가 그 곳에서 근무를 시작했기에 북한에서의 첫 출발이 아주 좋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운송 수단이 거의 없고 도로 사정이 매우 열악한 북한에서 27,000톤이라는 엄청난 양을 유통하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당시 북한에서는 전기가 매우 귀한 자원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작동하는 냉장 시설도 부족했습니다. GTZ 직원들과 대사관 직원들의 주요 임무는 고기가 여성, 어린이, 노인 등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제대로 전달되고 그것이 북한 군대에게 제공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2002년 2월과 3월(아직 고기가 해동되지 않아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추웠던 시기)에 전국을 돌아다니며 각 도시와 마을에서 고기가 어떻게 분배되는지 면밀히 살폈습니다.

이 여행은 평양 바깥의 생활 환경에 대한 생생한 통찰력을 갖게 해준 첫 번째 여행이었으며, 저희에게 지금까지 아무도 이런 일을 해준 사람이 없었다고 말하는 주민들과의 소통도 거듭되었습니다. 훗날 북한을 여행하는 동안 자신의 가족도 소고기를 받았고 그 일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는 분들이 수없이 많았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 프로젝트는 다른 인도주의 프로젝트들만큼 „지속가능성“을 띄지는 않지만, 적어도 북한 주민들과의 신뢰구축을 위한 훌륭한 방안이었다고 확신합니다. 인도주의적 지원 프로젝트의 취지에 맞게 말이죠.

  1. 현재 남북한의 정치 관계, 특히 국제사회의 남북한 문제에 대한 대응을 어떻게 보십니까? 독일이 두 나라 사이에서 어떻게 중재자 역할을 할 수 있습니까?

현재 남과 북 사이의 ‘냉전’ 또는 소통의 부재로 인해 평화로운 공존이나 통일의 가능성이 높아지기는커녕 오히려 감소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안타까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의 하노이 정상회담(2019년 2월)이 실패로 돌아간 후, 북한은 미국이나 한국과의 대화에 의지가 없음을 명확히 해왔습니다. 또한 북한은 핵무기화 및 핵 운반기술 분야에서 일련의 진전을 이룬 것으로 보이며, 필요 시 ‘위협’에 선제적으로 핵무기를 사용할 수 있다고 반복적으로 위협하고 있습니다. 다만, 어떤 시나리오가 그들에게 ‘위협’으로 간주될 수 있는지는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고 있지요.

북한의 이러한 행보는 미국과 중국 간의 대립이 심화되고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지정학적 상황 변화로 더욱 촉진되고 있습니다. 유엔 안보리는 지금까지 북한의 2022년과 2023년 무기 개발과 관련하여 아무런 제재 조치를 내놓지 못하고 있으며, 이는 당분간 변하지 않을 것으로 전망됩니다. 최근 윤석열 대통령의 미국 방문을 계기로 채택된 ‘워싱턴 선언’은 한미 양국이 북한에 대해 더욱 긴밀히 공조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으며, 북한은 이에 대해 이미 위협적인 태도로 대응하고 있습니다.

김정은 위원장은 북한이 핵보유국이라는 것이 아직 공식적으로는 국제사회의 인정을 받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 실질적으로는 핵보유국에 속하지만 -, 사실상 체제 경쟁에서 남한에 대항할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북한이 당분간 비핵화를 논의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점은 명백하기 때문에 앞으로 대한민국을 이끄는 어떤 정치인도 북한의 비핵화를 전제로 남북 간 협력 증진을 위한 길을 다시 열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북한의 핵무기 생산이 시작된 이래 20년 동안 국제사회가 북한의 핵무기 생산을 어떤 방식으로든 제한하거나 효과적으로 막을 수 없다는 것이 입증되었습니다. 미국과 중국이 이 문제에 관해 단합한다면 최소한 비축량 동결이라도 달성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가까운 미래에 그러한 공동 조치가 이루어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봅니다.

유럽연합(그리고 유럽연합 내의 독일)은 적어도 비공식 및/또는 하부 차원(트랙 3)의 회담을 통해 모든 관련 당사국들 사이에 만연한 교착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지만, 이를 위해서는 현재보다 훨씬 더 큰 범주로 대북 문제에 접근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할 것입니다. 북한의 코로나 정책으로 인해 철수했던 직원들이 평양의 대사관으로 복귀하는 것이 중요한 첫 단계가 될 수 있겠지만, 현재로서는 그러한 조짐조차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1. 한독청년네트워크가 더욱 활성화되고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현재 활발히 활동하는 여러분들이 이 질문에 더 좋은 대답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제 개인적으로는 다음 두 가지를 언급하고 싶습니다.

• 첫째, 한독청년네트워크가 한국에 소재한 독일 기업 및 독일에 있는 한국기업들과 연계(또는 ‘스폰서십’)하여 지속적으로 인턴십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 둘째, 멘토링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멘티와 멘토들을 행사에 초대하여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다만 저는 사적인 차원에서도 연락을 꾸준히 유지하려고 노력하고 있으며, 다른분들도 그럴 것이라 생각합니다).

  1. 본인 스스로 자신에 대해 평가를 내린다면 외교관으로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마치셨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또한 앞으로 외교관으로 경력을 쌓고 싶어하는 젊은이들에게 어떤 조언을 해주실 수 있을까요?

제의 성장환경과 현재까지 살아온 과정을 돌이켜볼 때, 제 자신을 성공적이라고 표현하지 않는 것은 그다지 겸손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전형적인 시골 출신 노동자 계급의 딸이기 때문이죠. 8년간의 초등학교(당시 교육과정은 그랬습니다) 과정을 마친 후 산업 사무직 견습과정을 마쳤지만, 포용적인 노트라인-베스트팔렌의 교육제도 덕분에 특별검정고시에서 합격하여 소위 „제3의 교육 경로“를 통해 대학입학자격시험이 „아비투어“를 준비할 수 있었죠. 덕분에 가족 구성원 중에서는 최초로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고, 또한 콘라드 아데나워 재단의 장학금 장학생으로서 아낌없는 지원을 받은 덕분에 경제적 걱정 없이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외교관 직책으로 은퇴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돌이켜 보면 배움의 즐거움과 끈기가 꽤 큰 역할을 차지했을뿐만 아니라, 또한 운도 일부 작용했다고 확신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연방 외무부 인사부에도 큰 감사를 표하고 싶은데, 해외 및 국내에서 제가 맡은 직책과 업무자체가 매우 흥미로웠고, 그래서 제 의욕을 자극하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여러분 모두 한번쯤 외교관으로서의 커리어를 고려해시길 추천해드립니다!

조언으로 말하자면 드릴 말씀이 많지만, 만약 제가 커리어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기존과는 다르게 하고 싶은 점들도 많습니다.
예를 들자면, 국제 정치의 여러 측면과 어려움을 떠올릴 때, 그 외에는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던 측면들, 즉 상사가 되어 인사관리 업무를 맡게 된다는 것, 한 기관을 관리해야 하므로 예산과 사무관리 업무도 하게 된다는 점, 또한 대사관의 중요한 업무 중 하나인 주재국의 다양한 종류의 대표단을 상대하는 일이라는 점 등이 있겠습니다. 한 일화를 소개해드리자면, 당시 봄베이 총영사였던 제 상사 중 한 명이 저에게 말하길 “이 일을 준비하려면 차라리 여행사 일을 배우는 게 더 나았을 거예요!”라고 투덜거린 적이 있는데, 그 말도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외교관 경력을 고려하고 있다면 스스로에게 물어봐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 3-4년 주기로 거주지를 옮길 준비가 되어있는가? 가족/파트너/자녀도 동반되어야 할까?
• 3-4년마다 새로운 분야, 동료, 환경, 언어와 함께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을 즐길 준비가 되어 있는가?
• 독일 관료주의의 규칙을 적절한 유머로 헤쳐나갈 수 있고, 마음에 내키지 않더라도 그러한 규정에 따라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가?
• 스스로를 주관이 뚜렷한 사람이라고 판단하는가? 모든 외교적 재치를 발휘하여 파견국가나 그 대표들에게 적절한 시기에 혹은 본국으로부터 „단호한 대응“이 기대될 때 그럴 준비가 되어있는가?
• 수일에 걸친 대표단 방문 후 자정을 훨씬 넘겨 보고서를 작성하게 되는 경우도 있는데,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한 페이지 이하의 보고서로 모든 관련 정보를 베를린에 전달할 수 있다면 당신은 외교관은 여러분의 천직입니다!

  1. 외교관으로서 여러 나라에 주재하셨고, 은퇴 후에는 한독협회 부회장을 맡고 계십니다. 한독관계에 지속하여 몸담기로 결심한 이유는 무엇이며, 한독협회는 그러한 활동에 어떻게 기여를 하고 있을까요?

한국은 정말 빠져나올 수 없는 매력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전직 서울 시장이 슬로건으로 사용했던 “I Seoul You!” 보다 더 나은 설명은 떠오르지 않는군요. 무엇이 저를 이 나라에 매료시켰는지는 설명하기 어렵지만, 서울에서 보낸 3년과 평양에서 보낸 3년 반의 시간이 너무나 인상 깊어서 은퇴 후에도 한국과 한국 사람들에 대해 더 깊이 관심을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때까지 유료회원으로만 활동하던 독일-한국학회에서 활동하기 시작했고, 나아가 베를린 자유대학의 한국학연구소의 강의와 세미나에 방문학생으로 출석하며 한국어 공부를 세 번째로 시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지난 10년 동안 한국(남한과 북한 모두)과 관련하여 관심 있는 모든 주제에 대한 신문 기사 및 기타 자료를 수집하여 현재는 제 책장에만 꽤 많은 자료와도서를 보유하고 있으며, 가끔 강의 요청이 있을 때는 이 모든 자료를 십분 활용하고 있습니다.

한독협회에서 저만큼이나 한국에 관심이 많은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저에게 큰 기쁨이고, 또한 한독청년네트워크, 한독포럼, 베를린 자유대학 한국학연구소, 여러 정치재단, 대한민국 대사관, 독일-한국 친선의원그룹 등 다른 기관들과도 지속적으로 많은 교류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항상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한국어 어휘를 배우려고 노력하다보니 알츠하이머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정도이지요. 끝으로 많은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